KR/EN

이상과 현실, 그리고 고전과의 대면
-석철주의 이상화된 조형세계에 대하여-


김상철(미술평론)


    마치 해빙되어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빙산의 무리와 같이, 혹은 아련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몽환적 환상으로 가득한 화면은 바로 작가 석철주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특징적 인상이다. 그것은 마치 대기 속을 부유하듯 한없이 가볍기도 하고, 또 천근의 무게를 지닌 듯 둔중하고 장엄하기도 하다. 모든 것이 유기적 생명을 지닌 것처럼 공간 속에 부유하는 그의 화면은 굳이 형상을 고집하지도 않고 색채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러하기에 그의 작업은 구상의 틀에 함몰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색채 유희에 경도되지도 않는다. 그저 그윽하고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독특한 울림을 형성할 뿐이다. 그 울림은 극히 섬세하고 여린 것이다. 그것은 분명 육안을 통해 감지되지만, 시각에 호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각에 의탁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양을 통해 전해지는 시각적 감흥이 아니라 현악기의 농현(弄絃)과 같이 떨림과 울림을 통해 전해지는 몽환의 파노라마이다.
        [신 몽유도원도]로 명명된 일련의 작업들은 바로 이러한 작가의 개성과 특질을 온전히 담고 있는 대표적인 형식일 것이다. 특정한 색조로 개괄되어진 산수 형식의 화면은 유장한 스케일의 장쾌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지 화면의 물리적인 크기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공간의 깊이와 크기에서 전해지는 심리적인 스케일이다. 거대한 산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이루어내는 산수의 묘취는 단연 독특한 것이다. 그것이 산수의 형식을 지니고 있기에 보는 이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의 산수는 전통적인 산수의 형식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의 산수는 자연을 아득한 곳으로 격리시켜 육안의 번잡스러움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더불어 객관이라는 구구한 해설을 배제하고 스스로 자율적인 조형의 규율을 확보함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피안의 자연을 구축해 낸다. 그는 산을 그리되 산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산의 형상을 허물어 공기를 표현하고 아득한 공간을 확보해 낸다. 이렇게 구축되어진 그의 산수는 보는 이와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있다. 마치 여백과도 같이 존재하는 이러한 거리감은 바로 이상과 현실이 교차하고 또 융합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산수라는 대단히 오랜 형식과 도원(桃園)이라는 상징성 강한 공간을 몽유(夢遊)함으로써 아득한 전설같이 잊혀져가는 자연의 이상적 경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을 통해 들어가 꿈결에 거니는 실낙원이라 할 것이다.             그의 도원은 보는 이와 일정한 거리를 견지하고 있다. 산은 무너지고, 또 피어올라 보는 이의 눈에서 재조합되며 작가의 이상을 구체화한다. 그것은 구차한 설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행위의 흔적들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작업에는 행위 하는 작가와 보는 이의 몫이 여실히 구분된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일 수도 있으며, 성스러움과 속됨의 나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러한 경계를 구획 짓지 않는다. 단지 작가로서 행위 하는 자의 몫과, 보는 이의 몫을 구분할 뿐이다. 작위적으로 해설하지 않기에 그의 몽유는 제약되지 않는다. 수식하고 설명하지 않기에 그 경계는 끝없이 확장되며 보는 이의 감성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읽혀지며 무수한 도원의 이상향에 이르는 길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작가의 시각과 이해는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준칙과도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자연의 기억]이라 명명된 작업들 역시 이러한 기조는 여전히 견지되며 그의 작업을 견인하고 있다. 일상의 소소한 인상들을 개괄하여 표현해 내는 그의 작업에는 무수한 행위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형상을 구축하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형상을 감추기도 한다. 행위의 목적은 단지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일정한 운율과 리듬을 형성해 낸다. 사실 그의 작업에서 보다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표현되어진 내용들이 아니라 행위의 집적을 통해 이루어진 우연의 흔적들일 것이며, 이러한 우연이 만들어내는 비정형의 질서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작업이라는 행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수렴되고 있다. 무수한 행위의 집적은 충돌과 대비, 그리고 조화와 균형을 통해 하나의 조형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의 상대적 가치의 복합적인 것의 조화이다. 실재하는 자연으로서의 풀잎들이 무성한 가운데 실루엣처럼 드러나는 화분의 설정은 이러한 대비의 연장선상에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의 대비일수도 있을 뿐 아니라, 표현되어진 것과 드러나는 것의 대비일수도 있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 작위와 무작위의 대비인 동시에 보여 지는 사실과 느껴지는 진실의 대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전통적인 재료에서 탈피한 새로운 조형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전통적인 동양회화의 다양한 요소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해 낼 수 있다. 일단 산수, 혹은 자연이라는 소재에 대한 접근방식도 그러하지만 특히 재료의 특성상 일정한 시간적 제약에 따라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 방식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감각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리는 것(畵)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寫)에 가까운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은근하고 침잠된 행위의 흔적들은 하나하나가 조형의 요소로 작용하지만, 결국 상호 작용을 통하여 하나의 틀로 수렴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작가의 호흡을 반영하듯 일정한 운율과 리듬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앞뒤를 나누거나 원근을 구분하지 않고 철저하게 평면성을 지향한다. 특정한 색조로 개괄되어 표현되어지는 거대한 평면의 전개는 바로 그의 관심이 보여 지는 실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드러냄으로써 절로 표출되어지는 또 다른 것에 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형상의 표현을 통해 정신적인 것을 표출해 낸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그것과 같이, 작가는 오히려 표현되어진 것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보다 풍부한 공명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백과 같이 무한한 해석과 변주가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스스로 작용하며 또 다른 의미와 가치를 형성해 내는 적극적인 것이기도 하다.       산수와 자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이제 오래된 고전을 마주하고 있다. 사실 [신 몽유도원도] 역시 우리미술의 고전으로 자리하고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주관적으로 번안한 것일 뿐 아니라, 백자와 분청 같은 도자기들을 조형화한 작업들 역시 기성의 고전적인 내용들을 현대적으로 조형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새로운 시도는 번안이나 차용과 같은 소극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는 선인들의 작품들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또 다른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전기의 [매화초옥도], 강희언의 [인왕산도] 등을 실재 비율에 맞추어 확대하거나 약간의 변형을 통해 공간의 성격을 변환한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본래 화첩 정도 크기이거나 족자 형식의 작은 그림들을 수십 배 확대한 대형 화면에 수용함으로써 강한 시각적 충동을 유발한다. 이미 익숙한 형상이기에 낯설지 않으나 새롭게 해석되어진 고전의 면면들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작가가 마주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저 고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거나 답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화면을 확대하여 이루어지는 시각적인 효과에 의존하는 것도 더더욱 아닐 것이다. 앞서 [신 몽유도원도]에서와 같이 그는 고전에 대한 번안과 재해석을 통해 오래된 과거와의 대면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늘을 반영하고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자 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새로운 시도는 절로 퇴계 이황의 시조를 연상케 한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니
고인을 못 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


    비록 선인들을 직접 대면하며 가르침을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작품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들이 거닐고 행하였던 길을 필촉으로 더듬으며 그 도리와 이치를 궁구코자 함일 것이다. 그것은 그저 옛 그림의 재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형상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그윽한 정신세계에 있다 할 것이다. 매화 가득한 곳에 소박한 초가집을 짓고 한가로이 독서를 하며 계절을 만끽함은 그야말로 은일의 표징이다. 변화가 일상화 되었을 뿐 아니라 속도의 가치가 중시되며 물질의 풍요로움이 삶의 척도로 작용하는 현실에서, 그는 돌연 극히 소박하고 전원적이며 탈속한 가치를 통해 오늘을 조망해 낸다. 그것은 그저 형상을 통해 읽혀지는 관념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유전정보에 의해 절로 읽혀지고 자연스레 체감되는 근본적인 가치일 것이다. 그것은 재치나 기교라는 표현에 의해 표출되는 말단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몽유도원도]의 번안과 해석을 통해 새롭게 이상화된 자연을 표출했던 것과 같이, 고전에 대한 대면을 통해 또 다른 정신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의 작업은 소재에 있어서 굳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산수로 표현되어지는 이상화된 자연으로서의 몽환적 풍경이나 일상의 소소한 인상들로부터 채집된 기억의 편린들, 그리고 도자기를 조형화한 작업들 역시 모두 이미 존재하는 옛 것들을 번안한 것이다. 작가가 이들을 작업의 화두로 삼아 창작의 동력으로 변환시킴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단연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극히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것들을 통해 전통의 의미, 혹은 오랜 기간 동안 우리민족의 삶과 연계되어 배태되고 숙성되어진 특정한 감성에 주목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대단히 전통적인 것들을 통해 과거와 대화하며, 극히 고전적인 것들로 오늘이라는 시간과 현대라는 가치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으로는 이미 화석화 된 낡고 진부한 것이지만, 그의 번안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확보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간 전통에 대한 재해석, 재발견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단순한 차용의 수준에 머물렀었음을 상기한다면, 그가 작업 전반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가치관과 지향점은 오늘의 현실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줄곧 형상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치에 주목하고 그것의 표출에 진력한 것이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고 전통과 현대를 나눈다는 자체가 진부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미술이 처한 상황은 여전히 이러한 준거와 원칙을 일정부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과도기로서의 미술이라는 시대적 환경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겠지만, 현대라는 이름으로 매몰되어진 수많은 가치에 대한 재발견과 재 조망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전통회화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그저 역사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대라는 시간 속에서는 별반 존재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것이 단순한 물질 생산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정신활동의 소산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것은 발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변화하며 그 내용을 풍부히 해 나가는 것이라 한다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의해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작가로서 석철주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고루한 전통 답습의 장인적 기질도 아닐뿐더러,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바탕으로 전통을 대면하고, 이를 창작의 동력으로 삼아 오늘을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의 작업은 익숙하지만 새롭고, 낯설지만 친근한 것이다. 자칫 전통이라는 한없이 깊은 늪에 매몰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작가는 이를 현명하게 극복해 내고 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이나 맹신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상이 되는 전통이나 사물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는 관조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거리가 확보되었기에 그는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 그리고 그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번안에 의한 창작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의 작업량은 실로 방대하다. 수량도 그렇지만 출품작 대부분이 가늠키 버거운 대작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간 그가 보여주었던 작업 과정은 두텁고 완강한 틀을 깨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소재와 표현, 재료와 기법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적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이제 오늘의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또 다른 틀이라 할 것이다. 이전과 다른 것은 그가 마주한 것이 형식이나 물질이 아닌 근본적인 정신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형의 가치를 주목하는 것이기에 번안은 무한히 다양할 것이다. 그의 작업은 현대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한 공감대를 확보한 채 이루어지는 익숙한 것이다. 더불어 그것이 그저 진부하고 낡은 틀 속에 갇혀 있는 박제화된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찬연히 빛을 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치열한 자기부정을 통해 자신이 처한 오늘의 좌표를 확인하고 오래된 과거를 통해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간 그가 보여주었던 변화의 양상과 치열한 성찰의 결과 등을 통해 미루어 볼 때 그의 새로운 시도와 접근은 충분히 또 다른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